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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김종서와 수양대군 계유정난의 설계자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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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우리나라는 조선왕조를 가지고 있는 조선의 역사가 아주 깊은 국가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살펴 보아도 많은 왕위의 왕권 다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오늘은 조선왕조의 제7대 왕 세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종대왕의 대업을 승계하였다는 치적 군주라고 알려져 있는 세조는 실은 왕위를 찬탈하고 피의 군권을 만든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이유는 왕위를 찬탈하며 수많은 대신들을 죽였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첫째인 문종에 비해 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차남 이지만 정치에 특히 왕권에 대한 야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 이였습니다. 세조는 처음 진양대군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인 세종은 수양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생을 마감한 숙제를 닮은라는 뜻에서 진양대군에서 수양대군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39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승하한 문종은 그의 아들 단종을 수양대군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의미로 세종때부터 왕을 모신 원로인 김종서, 황보인에게 단종을 부탁하게 됩니다. 영화 관상에서 보았듯 김종서는 무과 출신으로 자랐으나 문과로 전과를 한 다음 6진을 개척한 비상한 인물 입니다.  

 

조선을 창립했던 태조 이성계가 회군한 위화도 부근의 6진인 종성, 경성, 부령, 회령, 경원, 온성을 지키며 초기왕조에게 큰 공을 세운 인물이기도 한 김종서는 항상 국가의 중책을 맡았습니다. 또 문종은 이러한 원로 김종서를 신뢰하였으며 단종이 힘을 가질때 까지 잘 보필하라 말하였습니다. 



단종이 왕이에 오르면서 중신들에 의해서 황표정치가 시행되게 됩니다. 황표정지가 이루어 지며 왕에게 올려진 상소에는 노란색 표식이 있었는데 표식이 있는 인물만 선발하게 됩니다.


그러한 황표정치를 마땅치 않게 여기며 힘을 기르고 있었던 대중들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급기야 시간이 지나며 이 두인물과 국가의 중신들은 대립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수양대군은 원로인 김종서를 의식해 쉽게 자신의 속 마음을 들어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서로 만남을 가지며 왕권 찬탈의 급물살을 타게 됩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만난 자리에서 중국 한나라 시대의 책사 장량을 자신에 비유하며 수양대군은 유방으로 치켜세우게 됩니다. 


영화 관상에서도 보았듯이 단종이 왕권을 잡은지 불과 1년만에 수양대군은 원로인 김종서를 공격 및 척살하고 실제로는 안평대군과 황보인이 반정을 일으킴을 단종에게 허위 보고하고 그 틈을타 왕위를 찬탈하게 됩니다. 또 문인들에게 추앙을 받던 안평대군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뒤 강화도로 귀향을 보내 죽여버리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들이 24간안에 이루어 졌으며 수양대군이 왕권을 장악하는데 결적정인 시나리오는 수양의 책사라 할 수 있는 한명회의 머리에서 나오게 됩니다. 결국 계유정난 주모자인 김종서의 무리들은 역적으로 몰리게 되며 과거 역적에게 대했듯 3대가 멸하게 되었으며 살아남은 가족들은 노예로 팔려나갔습니다. 


왕권을 장악한 세조는 내놔병마도통사 영의정부사 겸판이병조사를 겸하게 되며 국가의 군권과 인사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단종이 왕위에 오른뒤 3년만에 수양대군이 왕권을 장악하게 되며 단족의 식구를 중심으로 당종복위 를 계획합니다.

 

단종이 즉위하고 있는 동안 가장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사육신의 난이라고 합니다. 세조의 왕위 계승식때 대성통곡을 하며 세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박팽년과 성삼문 입니다. 이들은 일종의 음모를 꾸미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기기 전 한명회에게 발각이 되어 처형당하게 됩니다. 처형 당하면서도 끝까지 세조에게 나으리라 부르며 자신의 지조를 지킨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생육신으로 은거활동을 하며 은둔하던 세조에게 항거했던 여섯 선비가 있었는데요. 서담수, 조려, 원호, 김시습 남효운, 이명전이 그 인물 입니다. 그들은 죽은 단종을 위해서 벼슬길에 오르지도 아니하고 의리를 지키다 생을 마감 했습니다.



결국 세조는 왕위에 오른지 13년만에 예종(세조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나라를 세운 왕이 가지는 묘호인 조를 쓰게 된 것은 후대왕인 예종의 고집에 의해서 였으며 이 것은 향후에 인조, 선조 에게도 불려지는 나쁜 관례를 남기게 됩니다.

 

왕위를 찬탈찬 세조는 죽음을 맞이 하였으나 한명회는 세도가를 형성하고 세력을 키워 나갔습니다. 이 세력을 훈구세력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때 왕위를 찬탈한 이 사건을 바로 계유정난이라 부르며 사건의 중심인물인 수양대군과 김종서, 한명회는 조선왕조의 흐름에서 큰 사건의 중심에 있었고 사후에도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