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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2차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대 걸림돌이 된 카를 되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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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세계 2차대전의 막바지로 치닫던 1994년 연합군은 전쟁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 육군 해군 공군의 연합 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2차 대전 당시 가장 유명하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데요. 당시 연합군의 총 사령관인 아이젠하워 장군 및 사령관인 몽고메리 원수가 주축이 되어 연합하게 됩니다.


당시 모였던 지휘관들은 상륙작전의 최대 걸림돌이 된 칼 되니츠를 생각하며 고민하게 됩니다. 과연 2차 대전은 영국과 되니츠의 둘간의 싸움 이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되니츠의 유보트 위용은 대단했다 할 수 있습니다.



1차 대전 당시 유보트의 함장으로 참전을 한 되니치는 영국군의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1차대전 후 해군을 정비하던 독일의 히틀러는 함대 정비를 위해서 되니츠를 임명하게 됩니다. 당시 되니츠는 히틀러에게 300척의 유보트만 있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거라 호언 장담 하게 됩니다. 독일은 육군에 비해 존재감이 없었던 해군의 현실과 잠수함 제작 기술의 한개로 떼 작전을 계획하게 됩니다.


전문가들의 전언에 따르면 실제로 당시 유보트의 가용대수가 100대 이상이 되었다면 영국은 패전했을 거라 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보트의 가용 대수가 10대 였던것을 봤을 때는요


독일 해군의 레더 제독이 히틀러와 해군의 운용에 대해서 갈등을 빚으며 레더 제독은 사임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히틀러는 되니츠를 총 사령관에 임명하게 됩니다. 당시 되니츠의 명성 만으로 연합군은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비스마르크급 함선의 출항된다는 소문 만으로 연합군의 함대가 공포를 느꼇을 정도로 위협적이였던 유보트는 당시 영국의 수상인 처칠이 가장 두려움을 느꼇던 존재중 하나로 유보트를 꼽기도 했다고 합니다.

 

독일군의 유보트는 당시 대서양은 좁다고 판단이 되어 태평양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는데요. 당시 미국의 수도이자 심장인 뉴욕의 앞바다 까지 침투를 하면서 미국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독일군의 되니츠가 버티고 있는 해협을 건너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펼친다는 것은 바로 자살 행위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작전이라는 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연합군은 당시 노르망디가 아닌 칼레 쪽에 상륙 작전을 시행 할 거라는 가짜 소문을 퍼트리게 됩니다.

 


이러한 가짜 소식을 첩보라고 접한 히틀러는 독일군 대부분의 병력을 칼레의 지상에 집중시키게 됩니다. 이 곳을 지휘했던 사령관은 북아프리카에서 명성을 쌓았던 일명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우는 롬멜이 맡게 됩니다.


연합군으로써는 천만 다행이라 생각이 됩니다. 롬멜을 노르망디에서 먼 곳인 칼레로 떨쳐 놨기 때문인데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날씨도 연합군의 편을 드는듯 맑고 비록 시계는 낮았으나 상륙작전에 최적의 날씨였습니다. 그 결과 연합군의 몽고메리의 주장대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독일군에게 치명타를 입히게 됩니다.

 

<에르빈 롬멜>


2차대전의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끼첫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결국 연합군의 승리로 가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곧 독일군의 패망을 불러 오게 됩니다. 이미 전세가 기울게 되었으나 독일군의 롬멜과 되니츠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으 반격을 준비하게 됩니다.


히틀러의 자살 후 되니츠는 되니츠는 히틀러의 유언으로 독일 제 4대 대통령에 취임을하게 됩니다. 총리의 자리에 요제프 괴멜스가 임명되기를 원했으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괴멜스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2차 대전 패망의 이유게죠?) 


또 당시 나치의 2인자로 불리우던 하인리히 히뮬러도 전쟁의 패배로 도주하다 영국군에 체포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나치의 2인자인 하인리히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되니츠는 최후 항전을 포기하고 동부전선의 영국과 미국의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됩니다.


<카를 되니츠>

 

그 이유는 소련군에게 항복 혹은 체포를 당할 시 엄청난 보복을 두려워 했기 때문인데요. 그 결과 연합군과 맺어진 전쟁 항복조항에 대표로 카를 되니츠가 되었고 결국 전범 재판에 회부되게 됩니다. 


독일의 국가 원수이며 해군의 사령관 이였던 되니츠의 죄목중 유보트 부대를 창설하고 무장 시킨 것이 가장 큰 죄가 되었는데요. 재판 당시 미 해군의 체스터 제독은 되니츠를 전폭적으로 옹호 하게 됩니다. 


또 독일의 누른베르크 재판에서 되니츠는 당시 그 일을 다시 하라면 할 것이라는 뼈 있는 말을 할 정도로 줏대가 있는 사람 이였습니다. 그는 사람이기 전에 군인의 한 사람으로써 나라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다면 적군에게 비웃음 거리로 전락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 이라네요.

 

결국 되니츠는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희대의 범죄인 유태인 학살에서는 무죄를 받은 관계로 10년이라는 형량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직 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는데요. 하지만 되니츠가 명장이였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은 없다고 합니다.